무하마드 알리 복싱과 인생에서 그가 레전드인 이유 1편
1편에서 계속
1967년 6월 베트남 전쟁 병역 징집 거부로 유죄를 판결받고
그간 쌓아온 모든 커리어와 직업, 재산을 잃고 파산한 알리.
심지어 수니파 이슬람 교단에서도 종파의 칙령에 따르지 않았다고 제명됨.
보석으로 수감은 면한 그는 항소하여 법정 공방을 계속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방송에 출연하고 대학들을 투어하며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는 강연을 함.
반전 운동 뿐만아니라 흑인과 백인간 연애 불가 발언 등
강경한 흑인 우월주의와 분리주의를 주장해 안티도 많이 생김.
그의 강경한 발언은 흑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베트남 전쟁 반대의 뜻을 밝히자
흑인 중심의 반전운동이 크게 확산됨.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자 흑인을 중심으로 피어오르던 반전 여론이
1968년 1월 구정 공세를 기점으로 전사자 수가 크게 늘자 불꽃처럼 급격하게 확산됨.
미국의 청년들은 징병을 기피하기 위해 해외 도피나 개인 신상을 조작하고
알리처럼 양심적 병역 거부를 실행하기도 함.
확산되는 징병 기피를 막고자 법원에서 중범죄로 다뤘고
조금이라도 기피 행동을 보이면 적용할 수 있는 최고 형량의 죄를 적용해 판결.
한편 알리는 주립 권투협회가 없어 시에서 경기를 승인할 수 있었던 조지아주에서
알리의 경기를 보고싶은 상원의원의 도움으로 아틀랜타에서 복싱을 할 수 있게 됨.
알리측은 곧바로 해비급 탑 10 랭커에게 경기를 주선했고
이에 응한 선수는 백인 인파인터로 정상급 인기를 누렸던 제리 쿼리.
1970년 10월 26일 무하마드 알리는
3년 반이라는 긴 공백기를 마치고 29살의 나이로 링 위에 오름.
오랜만의 복귀에 대한 우려를 떨쳐버리고
무패 전적을 유지하며 권투 황제의 건재함을 과시함.
그의 경기를 본 흑인 지위 향상협회에서
알리의 복싱 금지령이 차별적이라며
뉴욕주 운동위원회를 연방 법원에 고소했고 마침내 금지령이 해제됨.
돌아온 원조 무패 해비급 챔피언에게 금방 시합이 성사되고
아르헨티나 출신 터프한 오스카 보나베나와 싸우게 됨.
그의 바람대로 1971년 3월 8일 WBA, WBC 통합 해비급 타이틀 매치가 잡힘.
각각 250만달러의 엄청난 빅 머니 게임(현재가치 한화 300억).
당시 해비급 챔피언은 182cm 단신 인파이터 조 프레이저.
서른살의 31전 전승 돌아온 전챔피언 알리와
28살의 26전 전승 현챔피언 조 프레이저와의 타이틀 매치에
무패 전사들의 세기의 파이트라며 모든 언론의 주목이 쏟아짐.
도전자 무하마드 알리는 챔피언 밸트를 되찾을 생각에 흥분한 듯
조 프레이져에게 예고 KO까지 선언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트레쉬 토킹함.
경기 당일 세상이 멈춘 듯 모든 시선이 링 위에 집중됨.
하지만 경기 양상은 평소 알리가 하던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느려진 풋워크로 프레이저에게 거리가 잡히기 일수였음.
알리는 곧바로 일어나 KO는 면했지만 결과는 만장일치 판정패.
알리의 생애 첫 패배.
프레이저를 응원한 많은 백인과 우파 보수주의자들은 열광의 도가니.
알리는 첫 패배를 덤덤하고 성숙한 자세로 받아들임.
경기 후 무하마드 알리는 이제 노쇠했으며
조프레이저가 진정한 챔피언이라는 글들이 쏟아졌지만
알리의 인기는 견고했고 화제의 인물로 TV 방송에도 자주 등장함.
한편 1971년 6월 28일 대법원에서 날아온 희소식.
마침내 그의 징병기피죄 유죄 판결을 뒤집고 만장일치로 파기함.
이제 복싱에만 집중하며 꽃 길만 걸을 것 같은 알리.
하지만 그에게 또다시 시련을 안긴 인물이 등장하는데....
알리의 턱을 부순 인물 켄 노턴.
1973년 3월 31일 센디에고.
결과는 KO는 면한 15라운드 판정패.
당시 당시 평소 알리에게 볼수 없던 둔화된 움직임에
아나운서들이 연신 "알리가 지쳤습니다!" 소리쳤고
알리의 시대가 끝났다는 평이 쏟아짐.
화려한 토크도 두번째 패배의 그늘속에서 영향력이 사라지기 시작.
알리는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낌.
켄 노턴과 조 프레이저에 대한 화려한 복수!
그의 끊임없는 변화와 챔피언에 대한 도전!
복싱계 전설이 될 수 밖에 없는 무하마드 알리 이야기!
3부에서 계속!